朝鮮詩와 朝鮮風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준비하기 위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가장 요란하게 내세운 것이 영어교육이었다.
영어교육은 물론 중요하다.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영어가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실용적인 측면에서 영어교육을 중시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가르쳐 전 국민으로 하여금 영어를 구사하게 하려면 그에 앞서 전 국민의 의식 기반을 튼실하게 해야 한다. 뿌리 없는 나무는 자랄 수 없고 뿌리가 약한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한다.
오늘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뿌리는 우리의 민족문화요 전통문화이다. 언어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한글이 그 뿌리이고 한글의 뿌리는 漢字, 漢文이다.
그러므로 漢字, 漢文을 모르고서 한글을 말할 수 없고, 한국 사람이 한글을 잘 구사하지 못하면서 영어에만 매달리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그래서 ‘우리말을 잘하는 사람이 영어도 잘한다’고 하지 않던가?
민족문화의 뿌리인 한글과 한자에 대한 배려 없이 영어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이 시대에 자랑스런 선각자인 茶山 丁若鏞 선생과 燕巖 朴趾源 선생을 떠올려 본다.
다산과 연암이 살던 시대에는 중국이 곧 세계였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문화가 찬란히 꽃피었고 기술과 과학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지만, 우리나라 선비들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중국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중국의 문자인 한자, 한문이 國際語였고 世界語였다. 말하자면 당시 한자, 한문은 오늘날의 영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다산과 연암은 당시 국제어인 한문을 중국인 못지않게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世界人이었다. 물론 그들이 중국어 會話까지 잘한 것은 아니지만 능숙한 筆談으로 중국인과의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당대 중국의 일류학자들과 맞먹는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대도 그들은 중국문화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다산은 ｢老人一快事｣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조선 사람 我是朝鮮人
조선시 즐겨 쓰리     甘作朝鮮詩

 여기서 말하는 ‘朝鮮詩’는 물론 漢詩이다.
당시의 선비들은 漢詩를 지으면서 그 典範을 중국시에서 찾았다. 漢詩를 평가하는 모든 기준이 중국시였던 것이다. 즉 중국시와 얼마나 닮았는가로 시의 우열이 판가름 났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산이 ‘朝鮮詩’를 쓰겠다고 한 것은 더 이상 중국시의 눈치를 보지 않고 ‘朝鮮民族의 詩’를 쓰겠다는 선언이다.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의 정서를 조선식으로 표현하면 훌륭한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그는 실제 詩作에서도 ‘麥嶺[보릿고개]’, ‘高鳥風[높새바람]’ 같은 토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강진 유배시절에 그곳 농민과 어민들의 고난에 찬 생활상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중국시의 規律에 어긋나는 詩語를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를 쓸 때 중국의 古事만 사용하지 말고 우리나라의 古典을 널리 읽어 그 속에서 고사를 채취하여 쓰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漢字로 시를 쓰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민족 정서와 민족문화에 뿌리를 내리라는 당부이다.
燕巖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李德懋의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지금 懋官(이덕무의 字-필자)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과 기후의 지리적인 조건이 중국과 다르고 언어와 謠俗의 시대적 배경이 漢․唐의 시대가 아니다. 만일 중국의 수법을 본받고 漢․唐의 문체를 도습한다면 나는 다만 그 수법이 높으면 높을수록 意趣는 비루하게 되고 그 문체가 (漢․唐과)비슷하면 할수록 그 언어는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뿐이다. (《嬰處稿序》)

이 글은, 이덕무의 詩가 중국시의 規範을 따르지 않고 時俗의 자잘한 일을 다루었다는 世人의 비난에 대하여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덕무의 시가 훌륭하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모든 것이 중국과 다른 조선 땅에서 중국시의 흉내를 내어서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 연암은 그러한 이덕무의 시를 “조선의 國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격찬하여《詩經》의 반열에까지 올려놓았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말이지만 민족적 정서에 바탕을 두고 시를 써야 한다는 연암의 의도만큼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茶山과 燕巖은 당시의 世界語인 漢文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世界人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화와 전통문화의 뿌리를 망각하지 않았기에 우리 민족사의 우뚝한 봉우리로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어의 狂風이 휘몰아치고 있는 오늘날 한 번쯤은 다산과 연암의 위대한 업적을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宋載卲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본회 이사장

  이 글은 본회 이사장이신 송재소 교수님께서 회보의 卷頭言으로 쓰신 글입니다. 영어교육이 과열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선각자 茶山과 燕巖으로부터 우리 문화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고, 국어교육의 뿌리를 먼저 튼튼히 다질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교육당국자와 일선에서 직접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 여러분들께서 필독하시고 실천하시라는 의미에서 고전에 오솔길에 소개합니다.  오늘도 우리 문화의 뿌리를 다지는 일에 앞장서시는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裵源龍 (본회 상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