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오솔길 제17화
崇禮門(숭례문)이 무너진 까닭
國寶(국보), 나라의 보배가 하룻밤에 잿더미로 화했습니다. 실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육백년 전통의 고귀한 문화유산, 조상의 정신과 얼이 살아 숨 쉬던 문, 우리 민족의 자존심, 이 모든 것이 불타 무너진 崇禮門과 함께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은 불타서 흉물스런 숯의 잔해로 변해버린 崇禮門처럼 숯검정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崇禮門을 흔히 ‘南大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南大門은 ‘남쪽에 있는 큰 문’이란 뜻의 보통명사입니다. 그런데 한양성의 남쪽에 우뚝 서서 600년을 지켜온 문은 南大門이 아니라 崇禮門입니다. 높일 숭(崇), 예도 례(禮), 문 문(門) 즉 ‘예절을 숭상하는 문’이란 뜻의 고유명사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東方禮義之國(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컬어왔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부른 말이 아니라,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왔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려서부터 四字小學, 童蒙先習(동몽선습)을 통해서 기초예절을 배우고 익혔으며, 士小節(사소절)에서는 선비가 지녀야할 예절을 익혔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예절이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한양성의 第一門에다가 南大門이 아닌 崇禮門이란 현판을 붙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현판을 세로로 걸어서 ‘예절을 높이는 뜻’을 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南大門과 崇禮門이란 현판 이름을 가지고 다투다가 南大門이라 주장한 사람이 이겼다는 민간 설화가 생겼습니다. 崇禮門을 안 본 사람이 ‘南大門’이라 우기는 바람에, 직접 본 사람이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崇禮門이 南大門에게 졌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이번 火魔(화마)의 변고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서울 시민들의 90%가 崇禮門이라 부르지 않고 南大門이라 부를 것입니다. 崇禮門의 소재지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번지’입니다. 崇禮門이 세워진 지 600년, 그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南大門이란 현판을 건 적이 없건마는, 주변의 지명이나 회사명은 온통 南大門뿐입니다. 왜 주변의 은행지점은 ‘○○은행 崇禮門 지점’이라 붙이면 안 될까요? 왜 주변의 시장 이름은 ‘崇禮門 시장’이라 하면 안 될까요?
이미 이야기 속에서 南大門이 승리한 날부터 이 땅의 예절이 흔들려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冠婚喪祭(관혼상제)의 四禮(사례)가 그 어느 하나도 家庭儀禮(가정의례) 준칙조차 지키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그야말로 예절이 흔들려 무너지기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라, 이미 예절이 무너져 땅에 떨어진 단계로 봐야 할 것입니다.
‘88올림픽’이나 ‘2002 한일월드컵’ 때 반짝하던 거리질서는, 또다시 무질서로 변하여 길거리에는 함부로 버려진 담배꽁초, 휴지가 널려 있어 환경미화원들이 이를 치우는데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터넷 댓글은 칭찬과 격려의 글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성 댓글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東方禮義之國이 아닙니다. 예의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나라, 그 런 나라에 더 이상 예절을 상징하는 崇禮門이 필요할까요? 민간 설화에서조차 崇禮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崇禮門이 서 있는 지척에서조차 崇禮門이 아니라 南大門이라고 사방팔방에서 우겨대고 있으니, 崇禮門이 어찌 그 자리에 온전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崇禮門이 불타는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崇禮門 현판을 떼어내다가 실수하여 떨어뜨리는 장면을 뉴스 시간에 보았습니다.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 현판은 깨어지고 여기저기 균열이 생겨 새로운 숭례문을 세운다 해도 그대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崇禮門은 불타버렸고, 그 현판도 떨어져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고 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숭례문을 잃은 상실감에만 젖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국민들은 위기 앞에서는 언제나 일치단결하여 세계인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IMF 때 금을 모으기 운동이 그랬고,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유출 되었을 때 또한 그러했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서 밤새워 응원하여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연출한 것도 우리 국민들입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또다시 뭉쳐서 우리 손으로 숭례문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600년, 아니 새로운 1000년을 ‘예절의 문’이란 자랑스러운 이름표를 붙이고 서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정부에서 예절 교육에 저마다 앞장서서 東方禮義之國이란 이름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 없이 崇禮門을 다시 세운들 결코 그 문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崇禮門을 다시 세우면서 기왕이면 崇禮門 주변의 南大門이란 명칭을 모두 崇禮門으로 고쳐서 새로 세워질 崇禮門에게 기운을 북돋워 줄 것을 제안합니다. 불타버린 崇禮門, 떨어져 깨어진 崇禮門 현판이 우리 국민에게 남긴 교훈을 잊지 않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간곡히 호소합니다.
글 : 배원룡 박사(본회 상임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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